🌿 탄귤 작가노트 03

― “나는 왜 계속 그리는가”

기억을 더듬어보면,
어릴 땐 예쁜 색감, 생기로운 조화, 그리는 촉감 같은 감각들이 좋았어요.

원하는 걸 그림으로 그렸을 때
그게 현실이 되는 경험이 인상 깊게 남아 있기도 해요.

미술 학원을 다녀보면 어떨까 싶던 시기도 있었어요.
그런데 상을 타기 위한 그림을 그리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배우고 싶은 그림도 아니었어요.

그래서 이번엔 만화를 그려볼까 하고
친구와 만화책을 그리며 놀았는데
그것도 제가 그리고 싶은 건 아니었어요.

저는 예쁜 걸 좋아했어요.
그 당시 제 눈에 가장 예쁘고
그리고 싶은 건 ‘사람’이었죠.
사람을 그리고 싶었어요.

미술학원에서 그리는 방식 말고,
만화에서 그리는 방식 말고,
얼굴을 보고 그리는 것도 아니었어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그럼 나는 뭘 그리고 싶은 걸까.
내가 그리고 싶은 방식은
세상에 없는 것 같았어요.

공부가 중요해지고,
그림을 생각할 겨를도 없던 시기에
가끔 있던 미술 시간에만 그림을 그렸어요.

그때 선생님이 참 좋게 봐주셨던 기억이 있어요.
“그림을 배워볼 생각 없니?”라고 물으셨는데
저는 “없어요”라고 했어요.

학교 공부를 따라가기도 버거웠고,
입시를 위한 미술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거든요.

시간이 지날수록 공부는 더 어려워졌어요.
그래도 ‘하다 보면 되겠지’ 하고 그냥 했어요.
그런데 안되더라고요.

어느 날 한 친구가 미술반에 가기로 했다며 반을 떠났어요.
그때 예전 기억이 떠올랐어요.
공부를 못하던 한 친구가,
어린 나이에 그림으로 대학을 갔던 일이요.

그땐 ‘엄청 잘 그렸나보다’,
‘나도 그림 좋아하는데’ 하며
그 친구에게 묻고 싶었어요.
어떻게 한 거냐고,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던 거냐고요.

그래서 이번엔 반을 떠난 친구에게 물었어요.
그 친구는 원래 그림을 그렸대요.
왠지 김이 샜어요.
나는 그냥 막연히
미술반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 했구나.

학원도 다녀야 하고, 돈도 많이 들 텐데
그 돈이면 공부 학원을 가지,
미술하는 데 돈을 쓸 수 있을까 싶었어요.

‘그림을 공부한다’는 게 잘 상상이 되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내가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겠다는 건
공부 안 하고 하고 싶은 거 하며 놀겠다는 말처럼 들렸어요.

그래서 ‘공부나 해야지’ 그랬어요.

그땐 실기 없이도 미대에 갈 수 있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공부를 아주 잘 해야 하더라고요.

그래서 ‘좋아하는 게 또 있지 않을까’,
‘잘 맞는 걸 찾아야지’ 하며 비슷한 걸 찾아다녔는데
제가 하고 싶다고 느끼는 건 다 돈이 안됐어요.

그래서 알았어요.
나는 그냥 그림을 그려야 하나보다.
돈 신경 쓰지 말고,
뭐가 되려고 하지 말고,
그냥 하고 싶은 걸 해야 하는 사람이구나.

남들처럼,
하기 싫은 것도 적당히 하면서 어른답게 사는 건
저는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어른은 되지 못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냥 그들 눈엔 어리게, 하고 싶은 대로 살자.

그 마음을 먹었을 뿐인데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동시에, 그동안 내가 죽어 있었구나를 알았어요.

무엇을 그릴지 고민하는 순간부터
그리는 과정, 그리고 완성된 그림을 바라보는 순간까지 —
모든 순간에서 살아 있음을 느꼈어요.

그건 잘 그려서가 아니에요.
저는 같은 그림을 여러 장 그리며 완성도를 높이지 않아요.
한 번 그리면 그걸로 끝이에요.

그래서 제 그림엔
‘연하다’, ‘비뚤다’, ‘어색하다’ 싶은 곳에도
모두 의미가 담겨 있어요.

같은 그림을 여러 번 그리면
그 의미들을 놓치게 되니까
다시 그리지 않아요.

완성도 높은, 잘 그린 그림을 원하지 않아요.
나는 예쁜 게 좋아요.

그저 내 눈에,
모든 의미와 함께 느껴지는 예쁨이 좋아요.
그 안에 담긴 마음이 좋아요.
그리고 그 마음을 좋아하는 내가 좋아요.

그냥 그렇게 태어난 것 같아요.
하고 싶은 게 그림이에요.

왜 그렇게 태어났을까,
왜 그냥 하고 싶을까.

그건 그림을 그리면서 알았어요.
나는 눈에 보이는 가짜 속에 담긴 진짜를 그리고 있구나.

예쁨을 느끼는 감각들은
진짜를 그리라고 내게 맡겨진 선물이구나.

어둠과 빛, 그리고 색들은
내게 맡겨진 재료였구나.

나는 그것들로 진짜를 지켜야겠구나.
그래서 저는 계속 그림을 그려요. 🌿🍊